마이코(일본어:舞妓)는일본 에서 게이코 되기 전, 수습과정에 있는 예비 게이코를 말한다. 전통 일본 연회에서 손님을 위해 일본 전통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다.
마이코가 되려면 마이코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전문 교육을 받아야 된다. 마이코들의 나이는 보통 17살에서 20살 중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이코 양성 전문 학교에서는 전통 무용을 추는 법, 전통 악기인 샤미센을 키는법, 코우타를 부르는 법 등을 배운다. 이 과정은 주로 수개월에서 2년 까지도 소요된다.
마이코는 게이코와는 달리 소매가 긴 옷인 후리소데를 입으며 허리띠인 오비는 절반 정도 길게 늘어뜨리게 매는 차이점이 있다 .
견습 게이샤를 마이코(舞妓)라고 부르며, 이 말은 일본 한자로 "춤"을 뜻하는 舞(마이)와 "아이"를 뜻하는 妓(코)가 합쳐진 단어이다. 게이샤의 전통적인 모습하면 생각나는 흰 화장과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의 기모노 차림은 사실 마이코의 모습으로, 완전한 게이샤는 단순한 색상의 기모노를 입고 화장도 특별한 때에만 하얗게 칠한다.
게이코(일본어: 芸妓), 또는 게이샤(일본어: 芸者)는 예능에 종사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기생이다. 이들은 전통 음악 연주, 전통 무용 공연, 시짓기와 같은 다양한 일본 예술에 능숙하다. "게이샤"라는 단어는 일본 한자로 "예술"을 뜻하는 芸(게이)와 "사람"을 뜻하는 者(샤)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술의 달인"이라는 뜻이다. 그드른 단순한 매춘부는 아니였지만, 요정이나 여관에 호출되어 시간을 정해 고객의 이야기 상대를 해주거나 노래나 춤으로 흥을 돋구는 일을 하고, 성매매를 하기도 했다. 게이샤는 일본인에게 존경을 받으며,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이샤를 부르는 다른 말로는 게이코(芸子)가 있는데, 이는 교토에서 만들어져 교토에서 쓰이는 말이다. 교토는 길고도 영향력 있는 게이샤 전통을 가진 도시이기에, 이곳에서 전문직 게이샤인 게이코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5년의 수련을 거친다.
다른 도시에도 물론 게이샤가 있지만 교토와는 많이 다르다. 도쿄의 견습 게이샤는 "한교쿠"(半玉), 또는 술 접대부라는 뜻의 "오샤쿠"(御酌)로 부른다. 도쿄에서는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 6개월에서 1년 정도만이 소요된다. 도쿄 게이샤는 대부분이 교토 게이코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현대 게이샤는 오늘날까지도 "가가이"(花街)에 지어진 "오키야"라는 전통 게이샤 저택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성공한 나이를 먹은 게이샤들은 대부분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게이샤가 속하는 고상한 세계를 "카류카이"(花柳界, 화류계)라고 부른다. 유명한 게이샤인 이와사키 미네코는 이 용어에 대해 "게이샤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자신의 길을 지녔고, 버드나무처럼 공손하고 나긋나긋하며 강인하다."라고 설명하였다.
게이샤의 역사
게이샤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길지 않다. 게이샤가 등장하기 전인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부터 예능인으로 활동했던 여성은 있었으나, 진정한 게이샤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등장하였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창 제도의 일환으로 교토의 야나기초에 유곽을 건립하였고, 이 유곽은 후에 시마바라로 옮겨갔다.유곽에서는 예술 향유, 음주, 고급 매춘이 이루어졌다. 유곽의 오이란(花魁)들은 비싼 화대를 받고 매춘을 하였으며, 부유한 손님을 끌어들였다. 많은 예능인들 또한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였으며, 음악과 무용, 작시로 손님을 즐겁게 해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예능인들은 남자였으며, 그들 자신을 "게이샤"(예능인)나 "호칸"(어릿광대), "다이코모치"(일본 북 다이코를 치는 고수) 로 불렀다.
다른 일본 문화처럼 매춘의 세계도 매우 복잡해져갔다. 오이란과 함께하고 싶은 남자들은 모두 까다로운 의식과 예법을 따라야 했고, 매우 부유하거나 귀족 계급인 사람만이 이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찻집(오차야)이 시마바라 근처에서 생겨났다. 일부 찻집에서는 여성들이 저렴하게 매춘을 하였는데, "산차조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도로키"라고 부르는 다른 여성들은 무용가와 연주가로 활동하였다. 이 여성들은 등장한 지 얼마되지 않아 대중화되었고, 자신들을 시마바라에서 일하는 남성 예술가들처럼 "게이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700년경이 되면서 게이샤는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졌다. 몇 년 후에는 거의 모든 게이샤가 여성으로 이루어졌다.
조정에서는 게이샤가 예능인으로만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매춘부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다. 이렇게 제정된 법 중에는 오비(帯, 사시)를 뒤로 묶어서 기모노를 쉽게 벗는 것이 어렵도록 하는 법도 있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몸이 아닌 예술 행위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머리모양과 화장, 기모노 또한 오이란보다 단순해야만 했다. 이후 게이샤는 오이란보다 인기를 끌게 되었고, 1750년이 되면서 오이란은 사라졌다. 그리고 교토와 다른 도시에서는 새로운 게이샤 마을이 생겨났다.
19세기에 들어서 게이샤는 일반 여성보다 나은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때때로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위해 자신의 딸을 가가이의 술집으로 팔아 넘겼다. 다른 남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여 새로운 게이샤의 처녀성을 사는 경매 의식인 미즈아게를 치르기도 했다. 단나(후원자)로 불리는 부유한 남성이 게이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게이샤는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단나를 두어 지출을 충당해야만 했다. 게이샤에 대한 평판과 존중은 메이지 유신이 진행되면서 다시 상승하였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게이샤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지면서 더 이상 소녀들이 찻집에 팔리는 일이 없어졌고, 어린 게이샤의 처녀성이 팔리는 일도 사라졌다. 이 때부터 게이샤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만이 게이샤가 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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